나의 귀농 후기

40대에 귀농을 결심한 날, 그해 여름 강화도로 떠나기까지

고고파파 2026. 5. 1. 22:46

2017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습니다. 그 더위 속에서 저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인천 강화도로 짐을 옮겼어요. 40대 한복판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직업도, 환경도, 인간관계도 다 갈아엎는 결정이었으니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저는 시골 생활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요. 그래도 그날 짐을 트럭에 싣고 강화도로 향하던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어떻게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고, 왜 하필 강화도였으며, 자본도 노하우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풀어보는 첫 번째 회고입니다.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귀농을 갑자기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몇 년을 두고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왔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전했던 자영업의 실패였어요. 직장인 생활만 하다가 퇴사 후 몇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다 실패했습니다. 사업을 정리하고 보니 빚만 쌓여 있었어요. 자영업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잘 풀릴 때는 끝이 없을 것 같지만, 한 번 어긋나면 회복이 너무 느려요. 이 시기에 사귀던 사람과도 헤어졌고, 몸도 멘탈도 함께 망가졌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늘었고, 만성 통증 같은 것들이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 모든 게 동시에 닥치니까 도시에서의 삶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도시 생활에 미련이 없었어요.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귀농이라는 단어가 그 시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마침 정부에서 귀농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 정책이 활발하게 홍보되던 때였고요. 당시 알아본 바로는, 귀농 교육을 이수하고 영농 정착 자금을 신청하면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5억 원 가까이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어촌공사에서 운영하던 사업들이었어요. 재기를 꿈꾸던 저에게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정보였습니다.

강화도와 영농조합을 선택하기까지

귀농을 마음먹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디로 갈지 고르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강원도 삼척까지 둘러봤습니다. 풍경이 멋있었고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그리고 가공까지 시설이 갖추어진 것이 매력적이었어요. 다른 지역 몇 곳도 실제로 답사를 다녔습니다.

결국 강화도로 마음을 굳힌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째, 서울과 너무 멀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살던 도시와 완전히 단절하기는 무서웠고, 가족이나 지인을 만나러 가기에도 부담이 적은 거리가 좋았어요. 시골로 갔다고 해서 도시와의 끈을 다 끊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둘째, 농촌이지만 어느 정도 도회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완전한 오지로 가기엔 제 자신이 없었고, 강화도는 적당한 절충점처럼 느껴졌어요. 시골이지만 마트도, 병원도, 카페도 그나마 너무 멀리 있지는 않은 동네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이 선택은 옳았다고 봅니다. 만약 처음부터 더 깊은 지방으로 갔다면 적응 자체가 어려웠을 거예요. 강화도는 첫 귀농지로 무리가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지역을 정한 다음으로 막막했던 건 "내가 뭘 할 수 있는가"였어요.

농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아놓은 자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어요. 빚을 갚기에도 빠듯한 형편에 농지를 사거나 시설 투자를 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영농조합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면서 월급을 받는 형태였어요.

 

이 방식의 장점은 분명했습니다. 농사를 직접 배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수입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시행착오의 비용을 영농조합이 흡수해주는 구조였어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직접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니 큰 수익이 나는 구조는 아니었고, 일하는 사람 입장이라 결국 모든 결정권은 조합에 있었어요. 그래도 그 시점의 저에게는 이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미혼이었던 점은 이런 결정을 내릴 때만큼은 도움이 됐어요. 가족과 상의할 필요 없이 제가 결정하면 그게 끝이었으니까요. 다만 그 자유는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시골에 도착한 후 외로움과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부담은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었어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부터 천천히 알아갔습니다.

창고 2층 숙소부터 시작된 새 출발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강화도에 도착한 그해 여름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영농조합 식구들은 따뜻하게 환영해줬고, 새 환경의 낯섦과 신선함이 동시에 다가오던 시기였어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살 곳이었습니다. 영농조합에서 마련해준 공간은 창고 2층이었어요. 그 창고는 예전에 화재가 나서 한 번 크게 손을 본 곳이었고, 1층은 작업 공간으로 쓰고 2층을 주거 공간으로 개조해서 숙소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 개조 작업에 저도 직접 참여했어요. 벽을 손보고, 바닥을 깔고, 단열재를 넣고, 전기 배선을 손보는 일들. 보증금도 별도로 지불했습니다.

40대에 귀농을 결심한 날, 그해 여름 강화도로 떠나기까지
바닥 작업중인 숙소 모습

 

지금 돌아보면 그 작업 자체가 제 첫 귀농 노동이었어요. 농사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가다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처음엔 그것도 즐거웠어요. 내 손으로 살 공간을 만든다는 게 도시에서는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40대에 귀농을 결심한 날, 그해 여름 강화도로 떠나기까지 공사중인 숙소
바닥작업 끝나고 막바지 작업중인 숙소 모습

 

새 보금자리에 자리 잡고 얼마 안 됐을 무렵,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제 귀농 사연을 글로 적어 보낸 적이 있어요. 큰 기대 없이 보낸 사연이었는데, 며칠 뒤 진행자가 제 글을 읽어주는 걸 라디오에서 직접 듣게 됐습니다. 신청한 곡까지 함께 흘러나오는데 묘하게 울컥하더라고요. 며칠 후 안경 상품권이 우편으로 도착했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작은 신호처럼 느껴져서 한참을 들고 있었어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낯선 시골에 도착한 직후의 시기에, 그렇게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여줬다는 사실이 의외로 큰 위안이 됐습니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신청곡과 안경 상품권은, 제 귀농 첫 챕터의 가장 따뜻한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어요.

그날의 장밋빛 기대, 그리고 다가올 현실

서울에서 강화도로 옮긴 그날, 저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믿었습니다. 빚도 갚고, 농사 기술도 배우고, 정착 지원금도 받고, 몇 년 후엔 어엿한 농부가 되어 있을 거라는 그림. 그게 그날 제가 그려본 미래였어요.

그게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는 그 후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깨닫게 됩니다. 농사 일은 정말 파란만장한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시골 생활은 제가 만만하게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로 다가왔어요.

 

다음 글에서는 그해 여름이 가을로 넘어가는 동안, 그리고 첫 농사 시즌 동안 제가 마주친 진짜 시골의 얼굴을 풀어보려 합니다.

귀농을 고민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셨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결심하기 전에 본인의 자본 상태, 농사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그 모든 짐을 견딜 수 있는지를 한 번 더 점검해보세요. 정착 지원금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가시면, 그 지원금이 메우지 못하는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그건 그날의 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