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습니다. 그 더위 속에서 저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인천 강화도로 짐을 옮겼어요. 40대 한복판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직업도, 환경도, 인간관계도 다 갈아엎는 결정이었으니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저는 시골 생활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요. 그래도 그날 짐을 트럭에 싣고 강화도로 향하던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어떻게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고, 왜 하필 강화도였으며, 자본도 노하우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풀어보는 첫 번째 회고입니다.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귀농을 갑자기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몇 년을 두고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왔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전했던 자영업의 실패였어요. 직장인 생활만 하다가 퇴사 후 몇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다 실패했습니다. 사업을 정리하고 보니 빚만 쌓여 있었어요. 자영업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잘 풀릴 때는 끝이 없을 것 같지만, 한 번 어긋나면 회복이 너무 느려요. 이 시기에 사귀던 사람과도 헤어졌고, 몸도 멘탈도 함께 망가졌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늘었고, 만성 통증 같은 것들이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 모든 게 동시에 닥치니까 도시에서의 삶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도시 생활에 미련이 없었어요.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귀농이라는 단어가 그 시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마침 정부에서 귀농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 정책이 활발하게 홍보되던 때였고요. 당시 알아본 바로는, 귀농 교육을 이수하고 영농 정착 자금을 신청하면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5억 원 가까이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어촌공사에서 운영하던 사업들이었어요. 재기를 꿈꾸던 저에게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정보였습니다.
강화도와 영농조합을 선택하기까지
귀농을 마음먹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디로 갈지 고르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강원도 삼척까지 둘러봤습니다. 풍경이 멋있었고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그리고 가공까지 시설이 갖추어진 것이 매력적이었어요. 다른 지역 몇 곳도 실제로 답사를 다녔습니다.
결국 강화도로 마음을 굳힌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째, 서울과 너무 멀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살던 도시와 완전히 단절하기는 무서웠고, 가족이나 지인을 만나러 가기에도 부담이 적은 거리가 좋았어요. 시골로 갔다고 해서 도시와의 끈을 다 끊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둘째, 농촌이지만 어느 정도 도회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완전한 오지로 가기엔 제 자신이 없었고, 강화도는 적당한 절충점처럼 느껴졌어요. 시골이지만 마트도, 병원도, 카페도 그나마 너무 멀리 있지는 않은 동네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이 선택은 옳았다고 봅니다. 만약 처음부터 더 깊은 지방으로 갔다면 적응 자체가 어려웠을 거예요. 강화도는 첫 귀농지로 무리가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지역을 정한 다음으로 막막했던 건 "내가 뭘 할 수 있는가"였어요.
농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아놓은 자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어요. 빚을 갚기에도 빠듯한 형편에 농지를 사거나 시설 투자를 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영농조합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면서 월급을 받는 형태였어요.
이 방식의 장점은 분명했습니다. 농사를 직접 배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수입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시행착오의 비용을 영농조합이 흡수해주는 구조였어요. 단점도 있었습니다. 직접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니 큰 수익이 나는 구조는 아니었고, 일하는 사람 입장이라 결국 모든 결정권은 조합에 있었어요. 그래도 그 시점의 저에게는 이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미혼이었던 점은 이런 결정을 내릴 때만큼은 도움이 됐어요. 가족과 상의할 필요 없이 제가 결정하면 그게 끝이었으니까요. 다만 그 자유는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시골에 도착한 후 외로움과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부담은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었어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부터 천천히 알아갔습니다.
창고 2층 숙소부터 시작된 새 출발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강화도에 도착한 그해 여름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영농조합 식구들은 따뜻하게 환영해줬고, 새 환경의 낯섦과 신선함이 동시에 다가오던 시기였어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살 곳이었습니다. 영농조합에서 마련해준 공간은 창고 2층이었어요. 그 창고는 예전에 화재가 나서 한 번 크게 손을 본 곳이었고, 1층은 작업 공간으로 쓰고 2층을 주거 공간으로 개조해서 숙소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 개조 작업에 저도 직접 참여했어요. 벽을 손보고, 바닥을 깔고, 단열재를 넣고, 전기 배선을 손보는 일들. 보증금도 별도로 지불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작업 자체가 제 첫 귀농 노동이었어요. 농사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가다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처음엔 그것도 즐거웠어요. 내 손으로 살 공간을 만든다는 게 도시에서는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새 보금자리에 자리 잡고 얼마 안 됐을 무렵,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제 귀농 사연을 글로 적어 보낸 적이 있어요. 큰 기대 없이 보낸 사연이었는데, 며칠 뒤 진행자가 제 글을 읽어주는 걸 라디오에서 직접 듣게 됐습니다. 신청한 곡까지 함께 흘러나오는데 묘하게 울컥하더라고요. 며칠 후 안경 상품권이 우편으로 도착했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작은 신호처럼 느껴져서 한참을 들고 있었어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낯선 시골에 도착한 직후의 시기에, 그렇게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여줬다는 사실이 의외로 큰 위안이 됐습니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신청곡과 안경 상품권은, 제 귀농 첫 챕터의 가장 따뜻한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어요.
그날의 장밋빛 기대, 그리고 다가올 현실
서울에서 강화도로 옮긴 그날, 저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믿었습니다. 빚도 갚고, 농사 기술도 배우고, 정착 지원금도 받고, 몇 년 후엔 어엿한 농부가 되어 있을 거라는 그림. 그게 그날 제가 그려본 미래였어요.
그게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는 그 후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깨닫게 됩니다. 농사 일은 정말 파란만장한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시골 생활은 제가 만만하게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로 다가왔어요.
다음 글에서는 그해 여름이 가을로 넘어가는 동안, 그리고 첫 농사 시즌 동안 제가 마주친 진짜 시골의 얼굴을 풀어보려 합니다.
귀농을 고민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셨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결심하기 전에 본인의 자본 상태, 농사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그 모든 짐을 견딜 수 있는지를 한 번 더 점검해보세요. 정착 지원금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가시면, 그 지원금이 메우지 못하는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그건 그날의 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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